레츠(Local Exchange Trade System ; 지역화폐, 지방교환 교역 시스템) 소개

“악몽이 달콤한 꿈으로 바뀐 듯했답니다.”
영국 <벤브리지 레츠>의 마거릿 글로버는 연금을 받아가며 생활하는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혹독하게 춥던 겨울 벨파스트로의 여행을 마친 후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때 몹시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날씨 탓인지 파이프는 터져 있었고, 그녀의 집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연락할 도리가 없던 그녀는 지역 레츠 운영자였던 맬 뉴먼에게 도움을 청한다.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남자들이 한 팀을 이뤄 우리 집에 도착했지요. 수도를 차단하고 카펫이며 침구류를 밖으로 내다 놓더니, 가구를 추려내 제게 잠자리를 마련해 줬지요. 그리고는 물기를 닦아내려고 새벽 4시까지 걸레질을 했어요. 그 뒤로도 사흘 동안이나 집안 정리를 도와줬답니다. 하나도 걱정이 안 됐어요. 다 그 사람들 덕분이죠. 마치 기적과도 같았답니다.

마거릿의 이야기는 위기의 순간에 레츠 회원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레츠가 가져다 준 공동체 정신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특히, 마거릿 글로버의 경우에는 긴급 구조대가 편성되긴 했지만 이들은 특별한 ‘봉사’가 아닌 일이 끝난 뒤 지역통화인 ‘링크’를 받기로 하고 작업에 나선 것이니 특별히 ‘미안한 마음’으로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 그녀는 단지 그녀가 레츠 디렉터리에 올려놓은 ‘할 수 있는 일, 또는 제공품목’을 통해 벌어놓은(혹은, 천천히 벌어도 되는) ‘링크’만을 지불하면 그만이다. 국가 통화인 파운드화 없이 말이다.

LETS, 단순한 원칙이 불러온 잠재적 혁명
이처럼 지역화폐는 정부의 복지 혜택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보완할 수 있는 상호 부조적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1990년 초반, 영국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영국의 공동체적 가치를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국가 통화는 투기 자본에 의해 거의 독점되다시피 했고, 중소기업은 연쇄적으로 파산해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나 앉는 일이 일상사처럼 반복됐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정부는 IMF 플랜에 따라, 긴축 재정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복지 비용을 대폭 삭감했고, 사회 복지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로서는 오갈 곳 없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 이렇게 국가 복지 체계 마비된 상황 아래, 영국 대안 운동가들은 공동체 기업, 신용조합, 자조주택 건설계획, 그리고 여러 프로젝트를 포함한 수많은 대안 지역단체를 발족시킨다. 이러한 단체를 통해 지역주민들이 자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황폐화되거나 분열된 공동체를 되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유력한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이 바로 레츠로 알려진 ‘지방 교환 교역 시스템(Local Exchange Trade System: LETS)’이다. 레츠가 유력한 대안으로 도입된 것은 전적으로 레츠가 가지고 있는 ‘단순하지만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원칙에 기인한다. 재화나 서비스를 사고 팔기 위한 돈이 필요 없다는 것, 그리고 고유의 통화를 발행할 수도 있고 정이 담긴 고유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유혹은 ‘이상’이나 ‘공상’이 아닌 ‘현실’ 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현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등을 포함 영국 안에는 500여 개가 넘는 레츠가 지역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레츠의 원칙과 원리
* 지역경제 활성화
*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통제력 강화
* 교환을 통한 인간적 교류 강화
* 더욱 강력한 공동체 의식 고양
* 사회적 관계의 개선과 사회적 소외의 억제
* 사장될지 모를 기술과 재능의 충분한 활용
* 유급 노동에서는 불가능한 자신감과 자긍심 독려
* 즐거운 삶의 영위와 삶의 질 향상

레츠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나눔과 그로 인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복원이다. 더불어 가급적 지역 내에서 재화와 노동력을 공급,소비함으로써 자원의 낭비와 이동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는 등 생태적 배려가 담겨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가장 바람직한 거래는 당사자 사이의 직거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등가로 가늠하는 ‘화폐’를 이용해 거래를 한다. 그러나 국가가 발행한 화폐의 경우 투기 자금 세계은행에 의하면, 세계 통화량 중 95%가 투기성 자금이며 실물 교역에 관련된 통화는 5%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거나 소수에 의해 소유가 독점적이며 한정돼 있다. 따라서 지역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노동과 재화를 지역 안에서 호의적으로 순환시켜 지역 전체의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지역 화폐의 순환은 제도 경제권으로부터 소외된 잉여 노동력과 재화를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으며 거래 간에 발생한 인간적인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한다.

레츠는 검토되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지속 불가능한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런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당장 어렵다 할지라도 다소나마 이것을 개선하려면 가능한 한 생물지역주의를 토대로 해 우리 삶의 양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조직해야 한다. 그 한 방안이 바로 통화에 대한 통제 수단을 지역공동체가 갖고, 유휴 상태의 기술과 자원을 다시 순환시키는 지역통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제조업 공장 평균가동률 81.1%로 6년 6개월 만에 최고에 이르렀고, 수출도 역시도 지난 10월은 무려 51개 월 만에 최고의 경상수지 흑자를 보이는 등 하반기 들어 계속 경기 회복에 관한 구체적 징후들을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사상 최악의 가계 빚과 실업률, 카드 빚으로 인한 집단 자살과 같은 음산한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상황은 1990년대 초반 영국이 겪던 어려움보다 결코 더 낫지 못 하다. 확대되는 경상수지 흑자와 주식 상승으로 얻어지는 이득은 서민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투기성 자금으로 환원되고, 또한 이러한 순환으로 가계는 국가 통화가 항상 모자란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지역화폐와 같은 대안적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사장된 노동력과 그에 따른 상실감과 소외,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사람 사이의 불신과 공동체 붕괴는 과거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며 암울한 미래이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 뉴욕 월가의 다우 지수에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희극적 상황은 경기의 호황과 불황에 상관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처럼 거대한 세계자본주의 질서로부터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는,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여러 방안 중 유력한 대안인 레츠를 소개한 안내서이다. 또한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퍼져있는 영국 레츠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일종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저자 스스로가 밝히듯이 영국과 아일랜드의 레츠 단체를 방문하고 수십 명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공허한 구호나 추상적 이론 그리고 설문조사 수준을 뛰어넘어, 레츠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사람들이 레츠에 가입하게 될 경우 얻게 되는 현실적인 이익을 기록한 부분도 있고, 법적 문제를 비롯해 그동안 레츠가 직면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검토하기도 한다. 레츠와 관련한 식료품, 주택, 정신 건강, 교육 분야에서 일어난 근래의 흥미로운 발전과, 지방자치단체와 소규모 기업의 참여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도 살펴본다. 결론 부분에는 레츠의 이념을 21세기에도 계속 키워나가고 발전시키려면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소견도 담았다. 이에 덧붙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대전 <한밭레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포함되어, 10여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영국 레츠와 비교해 우리의 상황에 맞는 레츠를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이 지역 통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우리 국민들 사이에 좀더 널리 읽혀져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여러 지역에서 레츠가 들불처럼 새롭게 출현해 실험된다면 IMF 경제 위기가 다시 닥친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호주의 레츠 활동가 패트리샤 녹스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만약 세계 경제가 붕괴한다면 호주는 살아 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번창하는 대안적 경제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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