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대학 1학년. ‘지역’이라는 공간을 발견한 것은 9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였습니다. 진보적인 기독교동아리에 속해 있었던 저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위해 직접 구로지역선거본부에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집은 서울 동쪽 끝인 강동구, 학교는 서울 동북쪽 끝인 청량리, 선거운동은 서울 서남쪽 끝인 구로구. 수업이라도 있는 날이면, 서울을 한 바퀴씩 돌아야 하는 코스였습니다.

하여튼 코찔찔이 1학년이 선거운동본부에 처음 도착한 날, 배치받은 보직은 ‘독산3동 동책’이었습니다. 독산3동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저로서는 좀 황당했지요. 당시에는 선거운동을 위한 홍보물을 배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은 주로 돌아다니면서 홍보물을 배포하는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마스터로 밀었던 홍보물은 언제나 할당량에서 두 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손으로 잡고 다니면, 맨 바깥쪽과 맨 안쪽은 손에 잉크가 묻어서 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역선본의 일원으로 동네를 돌아다니고, 지역 활동가들하고 어울리는 경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인근 서울대에서 조직된 학생선거운동본부(학선본) 친구들이 교대로 왔는데, 이 친구들은 주로 10여 명씩 모여서 선전전을 하곤 했지요.

나름대로 지역주민들하고 말을 섞어야 했던 제 처지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지역노동운동가 선배와 함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돌리고 있을 때... 언덕 밑 조그만 골목의 교차로에서 ‘민중권력 쟁취가’가 들려왔습니다. 학선본 친구들이 선전전을 나온 것이지요.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을 노동자에게,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라는 구호로 시작되던 이 노래의 청취자들은 슈퍼 앞에 앉아게시던 몇몇 아주머니들과 지나가던 어르신들, 그리고 꼬마 아이들과 강아지 몇 마리였습니다.

저는 ‘아! 민중권력 쟁취가를 동네에서도 듣는구나’라는 벅찬 감동과 동시에 ‘이건 좀 아닌데...’라는 무언가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습니다. 몇 명되지 않았던 주민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일부는 무관심으로, 일부는 흥밋거리로 학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의 벅찬 감동과 어색함이 뒤섞인 그 느낌은 이후로 제 삶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느날은 혼자서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힘들기도 하고, 목도 마른데 마침 조그만 언덕 위에 교회당이 눈에 띄었습니다. 명색이 기독교운동을 하는 저로서는 교회의 존재가 참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끝내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갈지는 뻔했거든요. 그날 돌아오면서, ‘진보정당의 선거운동원을 반갑게 맞어줄 교회, 약국, 유치원, 슈퍼가 곳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참 하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저는 그때부터 무척 오랫동안 그런 교회를 만들 목회자가 될 것을 고민하면서 살았습니다.

대선이 끝나고, 그리고 패배로 규정되면서 많은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가장 매력있었던 것은 그람시의 ‘진지전’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진지’. 제가 이방인이 되어 독산3동 골목을 떠돌면서 찾았던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진지를 파는 것도 전쟁이고, 촘촘한 진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기동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제가 해야 할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지는 ‘시민사회’라는 공간, 아니 ‘일상’이라는 공간에서 종으로, 횡으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방된 종로거리를 누비며 ‘노동해방, 사회주의’를 외치는 쉽고도 재미있는 투쟁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밥상머리 대화에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조선일보 구독을 그만두게 하는 지루하고도 어려운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저는 그때 이후 진지를 파기 위한 삽질을 하고 있고, 별로 재미도 없고 결과도 안 나는 이 삽질이 더 중요해짐을 절감하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스웨덴과 벨기에에 대해 제가 살펴봤던 것들을 가지고, 성공한 삽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참고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진지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동전없는 진지전은 무의미한 삽질이고, 진지전없는 기동전은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가운데로 놓기 위해 반대쪽으로 좀더 구부리는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네요. 

엄형식 / 벨기에 사회학 박사과정, 진보신당 당원

작성일 : 2008-04-05 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