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이후 불붙을 '진보의 재구성' 논의를 위해 장작을 몇 개 올립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번째 장작입니다.

정당정치와 시민사회는 상호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아니, 주고받아야 합니다. 시민사회에서 지지기반의 실체를 갖지 못하면 정치에서 현실적인 힘을 동원하기 어렵습니다. 진보세력이 배제되었던 한국 현대정당정치에서 민주노동당의 출범을 통한 선택, 즉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라는 조직된 시민사회의 힘에 기반한 정치세력화는 보수세력이 독점했던 정당정치의 공간을 균열내었다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 균열을 통해 대중을 만나왔던 지난 4년간의 민주노동당은 안타깝게도 국민들로 하여금 진보세력의 실력없음을 확인하게 해준 계기일 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여러 가지 객관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시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세력의 대표체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시민사회에 스스로의 물적토대를 구축하고, 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을 하지 못한 채, 언제나 정세의 시급성을 이유로 동원방식의 정치활동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정세는 언제나 긴급했고, 언제나 심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긴박성과 심각함이 대중과 공유되지 못하고, 우리만의 긴박함과 심각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내용 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틀린 내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대중들은 올바른 주장을 듣고 떨쳐 일어나지 못했던 것일까요? 무지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환경에 놓여있어서?

저는 아주 최근까지 90년대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시민운동이 집중했던 ‘시민사회 만들기’는 더 이상 운동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그리고 폭주하는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기득권 세력 편들기에 대해 대중들이 침묵하는 이번 총선을 보면서 제 의견을 다시 곱씹어 보고 있습니다.

분명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릴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국민들은 저항할 것이고, 이는 다양한 투쟁을 통해 외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세력이 또 다시 머리띠를 불끈매고, 문자메세지를 통해 ‘**일 **시 **로 모입시다’만 반복하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극복하고 투쟁의 전선에 나서게 될까요? 정권과 보수세력의 문제를 폭로하면서, 투쟁의 수위를 나날이 높여가면서 임박한 ‘파국’을 전제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 될까요? 하지만 보수세력의 헤게모니에 저당잡힌 시민사회가 과연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요?

저는 총선의 결과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보신당에 있어서 이번 총선은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시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의 잔상속에 남아있고, 대중들은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등장한 우리를 선택할 이유를 쉽게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총선은 우리가 어디서 출발할 수 있는지를 가름하는 출발선을 확인하는 계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총선 이후 우리가 이야기해야할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수많은 토론과 실험들이 될 것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서 쓰고자 하는 제 글들을 총선 이전에 시작하는 이유는 총선결과와 무관하게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다시 진지전과 시민사회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논쟁을 다시 하는 것이 좀 구닥다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다시 진지전과 시민사회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아니, ‘다시’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랫동안 시민사회의 변화를 위해 묵묵히 애써온 많은 분들의 노력을 간과하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라는 표현이 좋겠군요. 여전히 진지전과 시민사회가 중요합니다.

특히 총선 이후 진보의 재구성에서는 지난 10여년 간 서로 다른 길인 것처럼 따로 걸어왔던 계급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의 성과를 화학적으로 융합함으로서 서로의 좌우편향을 교정하고, 시민사회 속에서의 물리적 실체 구축과 이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전략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제 고민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진지한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엄형식 / 벨기에 사회학 박사과정, 진보신당 당원

작성일 : 2008-04-05 0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