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엄습한 것인지 한 동안 맘이 줄곧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살다보면 우울한 일도 있고 그러니 별거야 없지만 흥미롭긴 하다. 민주노동당 초기시절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나는 일반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처럼 정치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결국 ‘정치’로 모아지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진보정당이 오른쪽극단으로 치우친 한국의 왜곡된 정치지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변에서 보는 직업적인 활동가는 아니다. 그럴 생각이 아직은 없고 능력도 안 된다. 그래서 참여에 있어 언제나 ‘정규’가 아니라 ‘비정규적’이다. 2002년인가 민주노동당 춘천시지구당이 소양2교 근처에 있을 때 잠시 지방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다. 그 때 누군가에 대한 ‘연정’을 품으면서 잠시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20대였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진보신당 창당과정에서 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제는 30대이기 때문에 누군가 때문에 우울할 일은 없다(--;). 근데 우울했다. 불확실한 내 앞날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보신당이 또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한다는 즐거움은 어느 일에도 있듯이 내가 원하고 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조직이 결성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렇지 않게 주변에 전화를 하면서 당원으로 입당시키다 어느 순간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주변에서 ‘한국적 현실에서 가능하겠냐? 차라리 양당제를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세력들을 지지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냐?’고 따져 물어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내가 입당시키는 사람들에게까지 내 제안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정당이야 몇 있지만 결국은 이념적으로 수구-보수 양당구조나 다를 바 없는데 한국의 정당구조에서 이제 막 자궁에서 나온 신생아와 다를 바 없는 진보신당이 어떻게 정치적 권리를 획득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 자신도 확신해서 가는 길이 아니고 당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는 길 아닌가.

  한국사회에서 사는 것은 진짜 슬픈 일이다. 현재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며 바라보면 더욱 그렇다. 책으로만 접한 역사라도 우리의 역사가 고통스러운 역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제식민지 지배뿐만 아니라 참혹한 한국전쟁을 치룬 이후에도 그렇고 한국현대사는 힘겨운 여정의 연속이었다. 그 힘겨운 시절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거리를 지나치다 나이 드신 분들의 주름진 얼굴이나 대나무 같은 손가락 마디를 볼 때면 더러 존경심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승만 독재에서부터 박정희-전두화-노태우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한국정치의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공정한 이념경쟁의 마당은 만들어질 수 없었고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와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한 지역정치가 굳게 뿌리박혀,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극복하고 보다 인간중심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 진보세력은 언제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길거리에서나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성과도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현실에서 진보는 변화된 현실 앞에서 ‘변화’할 것을 요구받는 시대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지나서야 겨우 진보정당의 모습으로 그러한 변화요구에 발맞출 수 있었고, 그동안 한국사회 내부에 잠재되었던 계급적 불평등과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담은 진보적 갈망들이 마침내 민주노동당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조건에서 민중의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이념을 실현할 자격을 잃게 되었고 거짓 진보의 속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 긴 역사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숙명 때문에 존재하는 제약조건들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이에 더해 참여정부의 몰락으로 우편향의 왜곡된 정치구조가 더욱 심각한 치우침을 보이면서 왼쪽의 정치영역은 아예 한 점 구멍 속에 빨려들어 없어진 상태와 같게 돼 버렸다. 또 언제고 다시 출현하려는 역사퇴행적 세력들이 고개를 들이밀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상태, 이게 오늘 한국정치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정한 진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고, 굳건하게 박힌 편향된 정치구조와 아직까지도 판치는 몰상식한 정치적 관행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에 대해 ‘비관’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2008년이라는 21세기 초엽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정당의 정치적 권리를 단지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책의 완성도에 따라 얻을 수는 없을 것이고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동의를 얻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라는 종합적인 실천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가 구체적인 어떤 성과나 당 운영의 모습들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나로 인해 입당한 사람들과 술자리라도 한 번 가질 때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가치와 정책의 실현가능성에서나마 내가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진보신당을 떠나겠다고 해도 난 그들에게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실천의 문제를 한 가지 얘기하고 끝낼까 한다. 탈당에서 창당까지의 과정에서 난생 나올 일이 없는 ‘TV에 얼굴까지 실으며’ 춘천모임을 맡는 위치까지 왔다. 어떤 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말 그대로의 ‘모임’의 ‘대표’로 호칭에서도 별 느낌을 못 가졌고 역할에 있어 큰 부담도 갖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대표’와 주변에서 생각하는 ‘대표’가 차이가 있고, 이제 한 발 물러 나 있다고 생각는데 여전히 ‘대표’로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더 중요한 시기에 빠져 있는 듯 해 ‘궂은 일’은 피하는 계산적인(--;) 모습으로 보일 것 같다. ‘키보드 좌파’라도 하라면 그나마 부담이 덜 하지만, 개인적이 사정이 있기에 어느 수준에서 어느 만큼 기여를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나 스스로 많은 짐을 질만큼 활동가적 헌신성도 없고 조건도 안 될뿐더러, 이런 방식이 좋은 지도 의문이다. 개인차원이라면 알아서 판단하면 될 것 같지만 지역의 한 조직을 생각한다면 좀 더 성의 있는 분이 역할을 교체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좀 더 많은 분들의 참여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우리가 보다 많은 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떤 실천계획이 좋을 지 머리를 모아봤으면 좋겠다. 춘천 이외의 다른 지역에 있는 분들의 조언도 좋을 것 같다.

작성일 : 2008-03-25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