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1)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갑자기 생태니 환경이니 하며 몇 가지 상징적인 가치들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기존의 민주노동당도 제시했던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민주노동당의 한계에 대해 기본적 동의만을 바탕으로 진보신당의 상을 그려가는 ‘과정’에 있는 진보신당 참여자들도 이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탈당파들의 ‘지켜보기’를 끝낼 수 있는, 진보신당의 ‘조용함’을 대신할 답은 무엇인가.

  진보신당 참여자들은 진보신당에 대해 ‘진보신당은 ~ 이러이러하다’라고 구체적으로 짚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신당은~무엇이 아니다’라고 추상적이며 소극적으로 규정하는 수준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적 이념지형에서 한나라당을 대표로 하는 수구집단과 그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아닌, 그러면서 특히, 구호는 진보를 외치면서 행태는 수구집단과 다를 바 없었던 민주노동당과는 분명한 차별을 내세운 어떤 가치나 실천방식을 지향한다고 할 것이다.

  진보신당이 제시한 비전을 보면, 진보신당은 큰 틀로 □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을 분명히 하며 21세기의 다양한 진보의 흐름들을 수용하면서 □ 핵심가치로 평등, 생태, 평화, 연대, □ 독자적인 노동정치, □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구현, □ 생활 속의 진보구현 □ 활력과 상상력, 생동감이 넘치는 정당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비전에는 입장을 달리하는 관망파들이 요구하는 가치들이 뒤섞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보신당 좌우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진보신당에 동참을 위해 관망파들이 제시하는 요건은, 아마 단순하게 나누면 민주노동당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보다 왼쪽’의 측면과 ‘보다 오른쪽’의 측면이 아닐까 싶다. 앞의 것을 ‘계급적 요구’라고 하고 뒤의 것을 ‘시민적 요구’라고 한다면, 진보신당이 탈당파들을 끌어안으려면 이 두 가치를 모두 수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할까?

  이 두 개의 가치는 고정관념에 따르면 서로 충돌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부분적으로 그런 가능성이 있겠지만, 난 전체적으로는 조화롭게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개념적인 정의가 따라야겠지만 대강의 이해수준에서 보면, 계급적 요구는 고용이나 임금과 관련해 일터나 노동현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이 먼저 떠오르고, 시민적 요구라고 하면 예를 들어 화상경마장 설치반대나 대학등록금인상반대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고용불안이나 장시간 노동이라는 압박감을 벗고 퇴근해 노동자의 신분을 잠시 벗은 후 길거리에서 화상경마장을 보게 되면, 이제 이 노동자는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화상경마장문제를 자신과 전혀 무관한 문제로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집에 가면 자식등록금을 고민해야 하는 학부모로서 등록금문제가 이 노동자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지역주민이자, 학부모인 것이다.

  또 시민이라고 하면 사무직 노동자나 서비스업, 자영업자의 인상을 많이 받는데, 이들이 직장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극단적 경쟁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강도는 공장노동자들보다 덜 할 수는 있겠지만, 일상에서 보게 되는 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피로도나 불만들을 보게 되면,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조직적인 요구를 못하는 것뿐이지 자본주의체제에 무관심하거나 긍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두 집단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기보다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고 진보신당이 이것들을 내부적으로 함께 안고 가는 것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이 양측면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변화된 한국사회에서 집권을 원하는 세력으로서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특히 ‘보다 왼쪽’의 입장은 이런 현실적 조건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더 크다. 이런 점에서 과도한 이념적 순결성이나 배타성은 한국사회에서 영원한 소수세력이나 외톨이, 독불장군으로 고립되고 말 것이다. 역사가 집단적 의지의 결합을 통해 진보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단순히 정체성만 구체화되면 진보신당은 자기 대답을 마련한 것이고 탈당파들에게 당당하게 참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진보신당의 비전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 자본주의 원칙의 극복과 다양한 진보의 흐름이라는 큰 틀은 사실, 민주노동당에도 있는 내용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적 원칙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인 면이 있다.

□ 평등, 평화, 연대, 생태라는 핵심가치들도 사실 민주노동당에서 다 내세운 것들이다. 물론 평화에서 평화를 ‘통일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라고 한 점은 통일을 그 자체로 하나의 당면한 실현목표로 여기는 민주노동당의 비현실적 인식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 생태나 연대는 그것이 핵심가치의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보다 그 강조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 독자적인 노동정치에 대한 강조는, 기존에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조직과 자금에 의존하려 했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의 ‘정치위원회’쯤으로 여기며 양자의 관계가 건설적인 비판과 협력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주면서 부정적 영향을 서로 미치는 건강치 못한 관계에 대한 반성이다. ‘노동조합에 의존하기보다 노동대중과 노동자운동에 기반을 두며 독자적인 정치적 실천의 결과로 평가받는다는 원칙’을 통해 새로운 노동정치의 실현의지를 분명히 나타냈다.

□ 그리고 나머지, 당의 뼈대에 살을 부칠 당내 민주주의나 문화의 내용들을 제시했다.

  진보신당이 제시한 비전은 민주노동당과 겹치는 가치들이 있지만 민주노동당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보를 구성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관망파’들의 보고 싶은 것이 기존의 민주노동당에서 봤던 ‘비스므레한’ 이 비전의 내용들일까?

"문제는 진보신당의 가치를 실현할 실천모습"

  뻔한 결론 같지만, 관망파들이 진정 요구하는 것은 진보신당이 스스로 지향하는 가치의 내용을 민주노동당처럼 공염불이 되지 않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실천방안과 실천모습일 것이다. 이 요구는 진보신당이 현재 처해있는 시간적, 재정적, 조직적인 모든 열악한 조건 속에서, 심지어 물어야할 대상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너무 과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요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성의 있는 답변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진보신당은 관망파들에게 진보신당은 바로 여러분들이 처음 민주노동당에 입당했을 때 실현하려 했던 그 가치들, 즉 ‘민주노동당이 처음에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들을 하고자 한다며, 창당일정까지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불완전한 수준으로라도 조금씩 이들에게 말을 걸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지금 진보신당에게 침묵이 금이 아닌 이유이다.

작성일 : 2008-03-07 0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