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어느 날. 진보신당 심상정 대표(당시 민주노동당 의원)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경제비서관을 역임한 정태인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료 협조 문제로 만났다. 두 사람은 대학 동기였지만 일면식은 없던 터다. 첫 대면에서 정 교수는 심 대표에게 대뜸 “대선 출마 안하느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하려면 계파 조직으로는 안되고 경제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17대 국회 재경위에서 재경부 공무원들을 상대로 똑부러진 질의를 벌였던 심 대표를 유심히 봐왔던 정 교수의 깜짝발언이었던 셈이다. 정 교수의 ‘말’이 ‘씨’가 됐을까. 심 대표는 민노당 대선 경선후보로 출마했다. 정 교수를 비롯해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 임영일 영남노동연구소장 등 쟁쟁한 전문가들이 심 대표를 도왔다. 권영길 의원과 함께 결선투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줬지만 아쉽게 민노당 후보가 되지 못했다.

총선 패배의 상처를 딛고 피어오른 촛불에서 진보 정치의 희망을 보았다는 진보신당 심상정 대표. 심 대표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진보 정치가 대한민국 미래의 필연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김정근기자

그로부터 몇 달 뒤 18대 총선에서 심 대표는 또다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는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와 김민웅·조희연·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노중기 한신대 교수와 최정규·이정우 경북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념과 성향을 뛰어넘어 ‘심상정’이라는 키워드로 하나로 모인 그들은 “정당·정파와 무관하게 심상정은 진보의 희망”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다.

심 대표는 그래도 여전히 씩씩해 보였다. 인터뷰 도중 총선 패배와 진보 정당의 한계를 언급할 땐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경제통’답게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선 “거꾸로 가는 정책”이라며 조목조목 따졌고, “촛불에서 진보 정당이 국민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며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지난 11일 진보신당 당사에 만난 심 대표는 “총선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입을 여는 것”이라고 했다.

-총선 패배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쉬움도 많았을 텐데요.

“유세 마치고 투표하기 전날 산 중턱까지 온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투표율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보정치가 갈 길이 바쁜데 당선자 의석이 하나도 없어 그게 가장 뭐…참…신경이 많이 쓰였고 아팠고. 많은 분들이 저 개인보다 진보정치를 보고 도와 주셨는데 그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낙선한 이후에도 낙선의 아픔을 많은 국민들이 아파해 주니까 마음의 위로가 많이 됐고 촛불 국면이 열리면서 ‘국민들이 진보정치를 외면한 게 아니구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구나’라는 확신을 가졌죠.”

-촛불집회에 거의 매일 참석하신 것으로 압니다. 촛불집회를 지켜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진짜 고단했어요. 아무 때나 조는 버릇이 생겨버렸어요. 그러니 ‘일하고 공부하고 밤을 새우는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달 이상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민주화 이후 변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드러낸 것이고, 그것을 국민들이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이번 촛불집회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10대와 여성들의 참여로 얘기하는데, 그것은 지난 10년 이상 질주해온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깊이 상처를 남기고, 미래세대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거든요. 그런 위험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이 광장으로 쫓아나오게 했고, 대한민국 사회에 스스로 우리를 바꿀 에너지가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죠. 또 한편으로는 정치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나온 구호나 요구는 그동안 진보 정당이 주장했던 것인데 진보 정당이 대안세력으로 서지 못해 거리의 정치가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촛불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일부에선 특수임무수행자회(HID)의 진보신당 당사 난입과 같은 사건이 보여주듯, 진보와 보수의 격한 대립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보수와 진보의 격한 대립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보수 독점적인 권력구조가 낳은 결과죠. 보수와 진보의 균형있는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격한 대립이 아니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보수의 격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어요. 시대착오적인 폭력으로 양심을 누를 수 있다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건 지난 10여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 행동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이 뭘 의미하느냐는 것이죠. 과거의 권위주의는 국가권력·군사정권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시장독재를 배경으로 한 신권위주의가 될 것입니다. 이런 테러 행위가 이명박 정부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다수 서민의 민심과 화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봅니다.”

-요즘 ‘소통’이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소통을 통해 민심과 화해할 수는 없을까요.

“이 정부는 소통이라는 단어에 대한 소통부터가 안되는 거 같아요. 이명박 대통령이 소통을 하자면 신뢰하고 정직해야 하는데 거짓말로 일관하고, 그게 통하지 않으니 강압적 방법으로 민심을 누르려 했죠.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소통은 ‘관철’이죠. 이명박 정부는 전자민주주의 시대에서 인터넷이나 촛불 광장을 공론의 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거든요. ‘명박산성’ 안에서의 소통이죠. 이미 국민들이 소통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생각해요.”

-촛불 국면이 길어지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가려져 있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이슈들로는 어떤 것을 꼽습니까.

“캠프 데이비드 숙박료로 과연 쇠고기만 줬느냐 하는 점이에요. 한·미동맹, 한·미혈맹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못지않은 퍼주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시 대통령이 8월에 그거 도장 받으러 오는 것인데…. 한·미 방위비 분담 문제, 주한미군기지 이전 문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등의 분야에서 또다른 퍼주기는 없었는지 조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북·미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진전으로 동북아 질서가 새롭게 짜이고 있거든요. 여기서 한국 정부만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는 상황인데, 한·미 또는 남북 문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오류가 점검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또다른 것은 비정규직 문제예요. 이랜드 노조위원장이 “촛불 시위 내에서도 행복하지 않았고 절망스러웠다”고 했는데 참으로 공감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비정규직 자체에 대한 정책 대안뿐 아니라 20대와 여성들, 즉 바로 사회에 나와 시장 만능주의에 편입될 두 축을 주력으로 세우는 주체의 재구성을 이뤄내지 못하면 진보 정당의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촛불국면에서 진보의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셨습니까.

“진보신당의 당원이 6000명에서 1만4000명이 됐어요. 총선 끝나고 낙선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열풍에서 3000명이 늘었고, 또 촛불국면에서 4000명 이상이 가입한 것이죠. 구 민노당을 탈당해 가입한 당원과 새롭게 가입한 당원의 비율이 4 대 6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진보신당을 민노당에서 분당, 탈당한 정당이라고 생각하는데 짧은 기간에 다른 정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민노당과 다른 정당이라고 하는데 어떤 점이 다릅니까.

“구 민노당의 비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과제로 1980년대식 NL·PD의 낡은 이념 구도에 갇힌 관료주의 정당이 국민과의 거리를 벌렸다고 보고 관념에서 현실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국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천으로 보여줘야하는데 민노당은 실천적 모범을 창출하는 수고에 인색했어요. 또 진보 정당은 기존의 보수 체제를 재해석하기만 하는 보수 정당과는 달리, 바꾸고 창조하는 것이 중요해요. 따라서 기본적으로 교육문화 정당이 되어야 하는데 기존의 민노당은 거의 그런 기능을 담보하지 못했죠. 이번 촛불시위가 진보신당이 표방한 진보정치의 혁신 방향이 전적으로 옳음을 입증했다고 봅니다.”



“쇠고기만 줬겠나, 현정부 오류 점검 해야”

-원내 세력이 없는데 향후 어떻게 정치를 펼쳐나갈 생각인가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진보정치가 대한민국 미래의 필연이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이번 촛불시위는 대통령에 대한 부정뿐 아니라 기성 야당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표출되고 확인된 것이라고 봅니다. 국민들에게 ‘아, 우리를 대변할 대안 정치세력이 없구나’라는 것이 각인됐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80%의 민심을 끌어안을 수 있는 대안 정치세력으로 진보정치를 어떻게 꾸려 나갈지가 고민입니다. 지금 개원됐지만 현재 국회 제도권 내에선 20% 정도의 협소한 대표성만이 가능해요. 이명박 정권의 기득권, 그리고 무능한 야당 때문에 대다수 80% 국민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희는 원내 의석은 없지만 소중한 인적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국민들에게 인기, 신뢰도 있는 분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이분들을 중심으로 새도 캐비닛을 구성하고, 이미 공론의 장으로 권위를 갖게 된 광장과 인터넷에서 소통하면서 시민 내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또 풀뿌리정치도 중요해요. 저는 교육문화센터 같은 마을학교를 열 생각인데요, 그렇게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국민들 속에 뿌리 박는 대안세력으로 자리잡고 싶습니다. 제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가칭)88만원세대위원회에선 진보아카데미 프로그램도 열어 지방당 조직과 함께 가동할 생각입니다.”

-원내 세력이 있는 민노당, 또는 뜻이 통하는 민주당 일부와의 통합 가능성은 전혀 없나요.

“합쳐야 하지 않느냐는데, 이미 재결합 논의를 넘어선 상황이라고 봅니다. 협소한 진보 정당 내부의 상황 변화가 아니라 80% 국민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비전과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과제입니다. 기존 정치세력 내의 정계개편에 크게 기대를 안합니다.”

-‘강만수 장관’으로 상징되는 요즘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강만수 정책’은 국내 1%와 미국을 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강 장관을 비판하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관치시대에 배운 잡기술로 용감하게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에요. 이명박 정부처럼 성장 위주의 정책 기조로 갈 때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수출 대기업을 위한 환율정책과 재정확대 정책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가장 먼저 한 정책은 엄청난 논란이 있었던 출총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수도권 규제 완화 등의 정책과 고환율 정책, 그리고 좌절되긴 했지만 재정확대 정책이에요. 문제는 ‘거꾸로 가는 정책’입니다. 두 가지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경제가 70%를 대외에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국제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충격을 완화할 대책이 필요한 것이죠. 고유가 상황에서 우리는 유럽 등 선진국처럼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거나 일본처럼 에너지 소비를 철저히 조절할 중장기적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고유가가 되면 환율이 반등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물가는 7~8개월의 시차를 두고 반영되니까 하반기에 물가폭등이 심해질 거예요. 그렇다면 국제환경에 대비해 개방주의를 재검토하고 70%에 이르는 대외 의존도에서 어떻게 내수를 강화할 것이냐로 가야 합니다. 곡물가도 마찬가지에요. 유럽의 나라들은 식량을 안보산업으로 생각해서 FTA도 다 농업분야 때문에 파토가 나는데 우리는 규제를 다 풀고 더 개방을 확대하는 식으로 거꾸로 가고 있어요. 두번째로 국내 양극화 해소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수 활성화 정책, 중소기업 육성, 그리고 서민의 가처분소득을 높이는 정책기조로 가야 하는데 소수 재벌 대기업 배불리는 정책으로 간다는 거죠. 국제정세와 국내 조건에 거꾸로 가는 정책이 맞물리면서 증폭된 효과가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거예요. 민생도 고달프지만 펀더멘털까지 흔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과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고, 노조의 활동에 대해선 엄정한 법질서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들이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서민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프렌드’를 위한 경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겁니다. 촛불시위가 광우병 이슈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그 바탕에는 경제에 대한 기대가 무참히 무너진 실망과 분노가 깔려 있죠. 대선 때 한나라당을 찍었던 국민과 지금 국민이 다른 게 아닙니다. 표를 주었지만 모두 다 알아서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죠. 속도를 내는 경제 정책에 여러 후유증이 있지만, 그 떡고물이라도 있다면 괜찮다고 용인해준 것인데 이제 속도 내는 수준이 아니라 브레이크까지 망가진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명박 대통령도 대통령 될 때 각종 죄질이 좋지 않은 범죄 혐의자였고, ‘강부자’ ‘고소영’ 내각에서 드러나듯이 이명박 정부 구성원들은 법과 질서를 초월해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법과 질서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적반하장이죠. 그렇지만 촛불로 대표되는 민심이 대안 정치세력을 완성시키는 쪽으로 가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있다고 봅니다. 그게 경제논리예요. 예컨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협상하게 되면 자동차 못팔아 먹고 엄청나게 보복당하고 한·미 FTA가 날아간다는 논리를 대면 재협상을 요구했던 시민들 중 상당수가 흔들릴 거라는 거죠. 인터넷 카페 회원과 토론하는 자리에서 어떤 아주머니 회원께서 솔직히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재협상하게 되면 경제 어려워진다고 할 때 당장 남편 직장 생각나서 광화문에 나가지 말아야 하나 생각했다는 거죠. 재협상 관련해서 국민들 얘기는 ‘건강과 생명을 바겐세일하지 말라’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경제와 바꾸지 말라’ ‘한·미 FTA와 같은 이슈에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쉽지 않다는 겁니다.”

-1시간여 넘게 진지한 이야기만 했는데 원래 농담을 잘 안하십니까.

“별로 재미있는 사람이 못됩니다.”

-특유의 강한 이미지가 부담스럽지 않은가요.

“TV토론 하면 엄마나 언니는 조금 부드럽게 하라고 해요. 어느날 굉장히 피곤해 목소리 톤이 다운되면 잘했다고 하고요. 그런데 지방에 내려가 당원이나 조합원들을 만나면 작은 목소리에 “심 대표, 국회 들어간 지 얼마 됐다고 약해졌나”라고 합니다. 정치인들이 보통 따뜻한 가슴, 국민 사랑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진정으로 서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따뜻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60년 보수정치에 굽힘없이 단호하게 맞서는 강한 리더십으로만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들이 정치인 심상정에 대한 신뢰의 기반이 아닐까 생각해요.”

-어렸을 적부터 당찬 아이였나요.

“국회의원 되고 나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했는데 동창들 중에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워낙 말이 없고 온순하고 존재감이 별로 없었죠. 지금 이미지는 노동운동을 좀 오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일 수도 있고 진보 정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날을 세워야 하니까 그런 면도 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제 스타일은 제가 크게 의식하지 못했어요. 이제 말투부터 머리 스타일, 옷 모양새까지 정치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은 알지만 초창기엔 전혀 의식해 본 적이 없어요. 제 나름대로 당차게 하는 게 소신이고 다수 서민을 대표하는 진보 정당의 의원으로서 소명에 충만해 했던 거죠.”

-모범생 이미지가 강합니다.

“아니에요. 중·고등학교 때도 밖으로 나돌아다녔어요. 야구장 같은 데 가서 장효조, 김재박 따라다녔고요. 종로2가 태화관 드나들면서 썬 플라워니 뭐니 서클활동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 4형제가 합쳐 모두 13수라는 말을 하는데요. 저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재수를 결심했어요.”

-똑부러지는 성격 탓에 오해나 비판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많죠. 저는 관계 속에서 성장한 남성들의 세계와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주로 사람들과 일 중심으로 관계해 왔어요. 그러다보니 정서나 문화 차이가 상당한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일정한 리더 수준에 오른 여성들이 다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 밑에서 일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죠. 처음부터 남성위주 사회 관계망에서 단련된 사람이 아니라 좋게 얘기하면 자유롭죠. 그리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들이 오래 가고요. 조금 부정적인 측면으로 하면 인간관계에서 약하죠. 그렇지만 정치인을 개인적 캐릭터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정치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이 무엇인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요즘 관심사는 뭡니까.

“보수정치권의 정치인들은 낙선하면 해외 연수도 가고 재충전의 기회도 갖고 하는데 우리는 뭐 그런 호사와는 거리가 멀고요. 그래도 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엔 의정활동에서 필요한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제 전체적인 시야를 갖추고, 내면을 추스르는 독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양소가 결핍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고전과 역사책을 많이 보려고 합니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책도 하나 쓰고 있고요.”

-17대 의정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일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렵던데요. 열정과 능력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제도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풀(Full)이 여기까지구나’하는 것이지요. 가장 아쉬운 것은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진보 정당이 비정규직 노동자 870만명의 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아쉽고 아픕니다. 만약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했더라면 일반 국민들이 진보 정당의 한계를 지적하더라도 전략 지지층을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봤을 텐데 그렇지 못했죠.”

-지난 대선 경선에 출마하셨지만, 뒷날을 도모하기 위해 우선 다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경기도 지역구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요. 경기도지사는 진보 정당이 가질 전략적 위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자체장을 하더라도 진보신당의 돌파 전략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털털한 청바지 차림의 심 대표는 인터뷰 내내 질문에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는 라디오 연결, 강의 준비 등의 일정이 남아 있다며 “개미처럼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총선 패배 이후 “진보정치는 시련 속에서 영글어간다”고 했던 본인의 말처럼 ‘정치인 심상정’도 진보정치와 함께 영글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심상정은 누구인가
25년간 노동운동·2004년 민노당 합류·‘경제통’ 이름 날려

25년 노동운동의 길을 걷다 진보 정치의 선봉에 선 진보신당 심상정 대표는 1959년 경기 파주에서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재수를 거쳐 78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뒤 사회참여를 지향한 대학문화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시위에 참여한다.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미대를 다니던 언니의 영향을 받아 긴 생머리와 스커트, 하이힐 차림의 말쑥한 모습이었던 심 대표는 시위대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고, 학생처에 불려가 근신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

80년대 말 학교를 떠나 구로공단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85년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던 중 노조위원장이 구속되면서 구로동맹파업이 촉발됐고 84년부터 10년간 수배생활을 거쳐 93년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민주금속연맹, 금속산업연맹 사무처장, 금속노조 사무처장, 민노당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 민노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원내수석 부대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특별위원장, 삼성비자금 특별 대책본부장 등으로 활약하며 대표적인 ‘경제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작성일 : 2008-07-17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