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5월 21일) 영서북부일반노조에서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를 주제로 노조원 내부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은 이상규 조합원의 발제로 시작하여 여러 조합원들의 문제제기와 토론이 있었다. 이날 이상규는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 식으로 이념 문제를 다시 꺼내는 이유로 ‘이념과 실천적 관성의 긴밀한 연관성’을 지적하였다. 즉 정책과 제도개혁 무시, 투쟁만능론, 과도한 대결주의 등의 운동권들의 실천적 관성은 근본적 급진사회주의론(PT독재, 폭력혁명론, 중앙집중 계획경제, 전면적 국유화)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상규는 현재 근본적 급진사회주의의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보다는 보다 실현가능한 사회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발제자는 스웨덴의 경험을 사례로 사민주의 실험의 성과와 한계를 짚으면서 한국에서 사민주의의 실현가능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실현가능한 사민주의로 가자”(이상규의 주장)

이상규는 스웨덴 사민주의의 성과로 ① 장기간 실천된 현실적인 실험이었다는 점, ② 자본주의 하에서도 상당히 높은 평등주의적 분배를 이루었다는 점, ③ 원활한 경제성장과 평등주의적 재분배정책의 양립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 ④ 높은 수준의 참여민주주의가 성취가능하고 평화와 연대문화의 확산을 이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반면 사민주의의 한계로 ① 사민당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구조적 권력은 온전되고 강화되었다는 점, ② 사민주의적 개혁 성과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순환에 강하게 구속된다는 점, ③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복보다는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선택하는 길이었다는 점, ④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맥락에서 사민주의의 효율성은 한계에 부딪히고 사민주의는 구조적 위기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이상규는 한국에서 진보세력이 사민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근거를 크게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사민주의는 성과와 한계가 검증된 유일한 사회주의 이념이고 사민주의 정책수단과 운동방식은 다른 실험들보다 시행착와와 큰 위험이 적기 때문에, 사민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세력이 가장 현실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사회주의 이념이다.
둘째, 서구 사민주의는 국가사회주의와 달리 대체로 경제,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이데올로기적 폭력적 억압도 매우 적었다.
셋째,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이고, 고도화된 산업구조와 정치적 민주주의 등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넷째,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 복지와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의 형성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사민주의 이념은 ‘개혁적 자유주의 이념’과 ‘근본적 급진사회주이 이념’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명박 정부에 대항하는-인용자) 다양한 개혁세력들이 잠정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이념이다.
여섯째, 최근 사민주의 정당들은 자유주의 정당들에 비해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어 생태주의 이념 및 정책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이 넓다.

이러한 근거에서 발제자는 사민주의 이념이 노동운동가들에 만연한 근본적 급진사회주의, 전진 등의 애매한 민주사회주의론(유령사회주의론)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하기에, 이제 진보세력은 기존의 틀을 넘어서서 사민주의로 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대안이 아니다"(근본주의자의 비판)

역시 예상대로 근본적 급진사회주의자들과 근본적 생태주의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첫째, 사민주의는 사소한 개량을 위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에 안주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한 이념에 불과하기에 사회주의적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사민주의는 ‘성장을 통한 분배’를 추구하기에 성장주의의 덫에 빠질 수밖에 없어 생태위기 시대 대안이념이 될 수 없다.
셋째, 사민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분배는 제3세계의 자원을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에 다름아니고, 제국주의적 착취는 사회주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기에 사민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넷째,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사민주의와 복지국가는 위기에 빠지고 있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
다섯째, 이렇게 오랜 사민주의 운동과 높은 노조조직율을 자랑하는 서구에서도 사민주의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데 하물며 자본의 강한 반발, 자영업자의 높은 비율, 낮은 노조조직률, 지역주의적 선거구조, 소선거구제 및 대통령제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성공하겠는가?

이상의 근본주의자들의 논의를 요약하면, 사민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비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존해야만 하고, 생태와 국제연대의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고, 세계화 시대에 지탱하기 어려운 체제이고, 한국에서 성공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사민주의는 사회주의 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민주의가 근본적 사회주의보다 낫다”(이상규의 반비판)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상규는 일관되게 ‘네거티브 방식’으로 응수하였다. 즉 사민주의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인 평등과 복지의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던 어떤 사회주의 실험(국가사회주의 등)보다 훨씬 높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낮은 노조조직률 등 한국적 상황은 사민주의의 실현가능성을 떨어뜨리지만, 이 상황은 근본적 사회주의의 실현가능성을 더 떨어뜨린다. 따라서 성과도 실현가능성도 매우 희박하고 대중들에서 멀어지는 실천만 남발하는 근본적 사회주의에서 벗어나 그래도 성과와 실현가능성이 좀 더 나은 사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세력의 살 길이라는 것이다.

네거티브를 넘어 포지티브한 논쟁을 하자!

이번 토론의 가장 큰 성과는 이상규의 커밍아웃과 진지한 성찰이다. 그간 술자리를 넘어서서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었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 토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이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상규의 문제제기와 반론에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상규는 사민주의를 주장할지라도 여전히 적어도 이념적 수준에서는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제기는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되 사회주의에 이르는 경로가 국가사회주의 경로이냐, 아니면 사민주의 경로이냐 식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였다고 본다. 과거 최병천이 전진의 김종철에게 문제제기 할 때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 문제제기가 보다 잘 설정되어야 제대로 된 토론이 진행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근본적 사회주의보다 사민주의가 낫다는 근거를 주로 근본적 사회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제기한 점이다. 물론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것만으로 근본적 사회주의자들이 사민주의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민주의의 바람직함과 실현가능성에 대해 보다 포지티브한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민주의가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전망의 포기가 아닌 사회주의 전망과 연결될 수 있는 경로를 밝혀야 한다.

셋째, 이상규도 인정하듯 사민주의에 한계가 있다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한국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민주의의 오류를 줄일 수 있고 근본적 급진사회주의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민주의 체제가 국가사회주의보다 덜 독재적이고, 덜 관료제적이었을지라도 여전히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던 많은 사민주의 나라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틀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장하지 못했고 또 다른 국가주의 프로젝트로 전락하였다. 과거 전진이 “국가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자”고 주장했을 때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전진의 고민을 사민넷의 최병천처럼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로 조야하게 양분화한 후 전진의 제안을 단순히 ‘유령사회주의’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진지한 고민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상규는 근본적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논쟁에 임하였다. 나는 이상규의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 근본적 급진사회주의자들도 네거티브한 방식이건 포지티브한 방식이건 간에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면서 토론에 나서길 기대한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근본적 사회주의자들의 다섯 가지 문제제기’와 ‘사민주의의 한계와 전망’이라는 논쟁거리를 중심으로 포지티브한 논쟁에 나설 것을 약속하며 토론회에 대한 짧은 소감문을 마치고자 한다.

이 논쟁을 보면서 홍세화 선생님께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나에게 했던 말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프랑스에 있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었겠지만, 나는 한국에 있어 사민주의자가 되었다”

작성일 : 2008-05-21 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