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회의원 노회찬씨(52)에게 물었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 배지가 떨어졌으니 실업자가 아니냐, 이젠 뭘 해 먹고 살거냐고.

그는 망설임없이 두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진보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뭘 해 먹고 사는 건 걱정도 안한다. 지난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지 달기 전에는 원래 그렇게 살아왔다.”

“실업자라니, 원래 그렇게 살았다”

그의 말은 맞다. 진보신당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통계청의 한국표준직업분류 상으로 엄연히 ‘정당 고위 임원’이다. 물론 앞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수입이 생기는 일인지는 모르나 그의 말대로 실업자는 아니다.

노회찬 전 국회의원의 선거 사무실. 아래에 그동안 국회의원을 하며 받은 감사패와 공로패가 죽 놓여있다.

지난 4월 9일 총선에 진보신당 노원 병 후보로 출마한 그는 국민과 지역주민을 두 번 놀라게 했다. 하나는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상대후보를 크게 앞선던 그가 낙선(2433표, 3% 차이로 졌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40%가 넘는 (3만2111표를 얻어 40.1% 득표율을 보였다)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지난 23일, 서울지하철 7호선 마들역 인근의 자신의 선거사무실에서 열린 선거대책본부 해단식에 참석한 노회찬씨를 만났다. 건물 안내판에는 벌써 '전 국회의원 노회찬 선거사무실'로 바뀌어 있었다. 진보신당 당원, 자원봉사자, 시장 상인들, 지지자들 60여명이 참석했다.

그는 먼저 총선에서 낙선했고,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간에 몇몇의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후보의 유명세나 외모를 보고 찍었다’는 얘기가 나돌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 유권자들을 탓할 수 없다고 했다.

“유권자가 아니라 진보정치가 문제다”

그는 자신도 나름대로 유명세 좀 탄 사람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4년전 17대 총선에서 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는 비례대표여서 299명 국회의원 당선자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이 확정됐다. 말하자면 꼴찌다. 그런데 그 당선자 중 내가 가장 유명해졌다. 방송 3사 주부 대상 프로그램에 다 불려다녔다.”

그는 또 2005년에는 ‘안기부 X파일’을 공개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탔다. 그의 말대로라면, 2006년 5월에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그는 출마하지 못했다) 이전에 실시된 인기도 조사 중 자신이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는 4·9 총선에서 낙선했다.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분석했다. “길게는 30년, 짧게는 15년으로 볼 수 있는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에 대한 평가다. 그동안 진보정치가 얼마나 감동을 주지 못했으면 유권자들이 당과 후보의 정책과 노선보다 후보의 유명세나 외모를 보고 찍었겠느냐.”

그는 그 ‘외모보다 감동을 주지 못한’ 진보정당 얘기를 꺼냈다. “운동권 사람들, 물론 자부심이야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것만 파 먹고 살 수는 없다. 한참 민주화, 노동운동을 하던 때와 지금의 정치와 경제, 사회는 너무 달라졌다. 그러한 변화는 진보정당들에게도 '운동권정당'에 머물지 말고 변화하라고 요구한다. 강성과 낡은 의식에서 벗어나 국민을 바라보고, 국민을 상대로 새로운 진보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 이유다. 사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인 그는 4·9 총선에서 낙선하기 전인 지난 3월, 탈당함으로써 국회의원 신분을 버렸다. 그가 국회의원 배지가 없어 실업자(?)가 됐다면 ‘자발적 실업자’인 셈이다.

“애시당초 민주노동당을 나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몰린 거다. 당 분열로 탈당 문제가 불거질 때만 해도 나는 탈당파들을 만류하고 설득했다. 2월 당대회 때 혁신안이 통과되면 당이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혁신안이 부결됐다. “정당에도 자기 조직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다른 조직은 따돌린다. 그러다보니 당에서 내밀린 거다.”

그는 민주노동당을 탈당, 국회의원 배지를 스스로 반납했다. ‘진보정치도 혁신돼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 때문이었다.

지난 23일, 마들역 인근의 선거사무실에서 열린 선거대책본부 해단식에 참석한 노회찬씨와 김지선씨부부 ⓒ경향닷컴

노회찬씨의 별명은 ‘호빵맨’이다. 언론에 얼굴을 자주 비친 바가 있으니 한번 돌이켜보라. 넓은 이마와 늘 홍조가 도는 툭 불거진 광대뼈, 영락없이 명랑만화 주인공 ‘호빵맨’이다. 지난 4·9총선 때도 그의 캐릭터는 ‘호빵맨’이었다. 선거운동원들은 호빵맨 가면과 차림새로 지역을 돌았다. 생긴 것도 생긴 것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에게 ‘호빵맨 노회찬’은 더 의미가 있다.

“노회찬씨는 진보정치인 가운데 노동자 서민과 괴리감이 없는,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쉽고 핵심을 찌르는 말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호빵 속 달콤한 팥소와 같잖아요.” (김병우씨, 39세, 진보신당 당원)

“처음 국회의원이 된 뒤 제가 홀딱 빠졌어요. 머리에 든 게 다른 정치인들과 달라요. 뭔가 바로잡으려고 하고. 그래서 만사 제쳐두고 따라다니지요.” (문윤자씨, 70세, 상계2동 주민)

세균맨과 싸우는 호빵맨 “나는 영원한 팬”

그의 지지자들은 서민과 노동자를 위해 일관되게 살아온 점을 들어 그를 호빵맨이라 부른다. 만화 ‘호빵맨’이 시종일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세균맨’과 싸워온 것처럼.

노회찬씨의 학력을 보면 ‘좋은 길 놔두고 험한 길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경기고를 나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학력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왜 주류의 길을 들어서지 않은 것일까.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 명료하다.

“엘리트 학교를 나온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무리 유신시대, 전두환 정권시대에 학교 다녔더라도 학교에서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라’고 배운 적이 없다.”

그가 70년대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80년대 들어 노동운동에 투신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엘리트주의 운동에 실망했다. 엘리트들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낮은 계층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용접일 배워서 먹고 살기 급급해 인권도 권리도 모르고 사는 노동자 곁으로 갔다.”

그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도 있었다고 했다. 학생 운동만으로는 전두환 군사정권을 밀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민중이 하나 돼야 한다, 그가 노동운동에 투신한 또 하나의 이유다.

그의 ‘유명한’ 촌철살인 언변은 노동운동 현장에서 저절로 길러졌다. 학생운동 때의 현학적인 말로는 노동자, 서민들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적절한 비유, 핵심을 놓치지 않는 적확한 화술이 필요했다.

노회찬씨가 해단식에 참가한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진보정치는 물과 같아 길이 없어도 멈추지 않고 새 길을 낸다”며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활고(生活苦)에 대해 다시 물었다.

“걱정하지 않는다. 국회의원 안해도 실업자는 아니다. 강연도 하고 책도 쓰고, 그러면 먹고살 만큼은 되지 않겠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해단식에 같이 참석한 그의 아내 김지선씨(54, ‘인천노동운동의 맏언니’라고 불릴 정도로 김씨도 노동운동가다.)도 ‘그 건 맞다’고 한다.

“학교에서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배운 적 없다”

“국회의원 할 때 한달에 180만원 정도. 그 전에는 한번 80만원 가져온 것 빼곤 많아야 50만원 정도였다. 아이도 없고 둘이 사니 그래도 괜찮다. 단, 십만원이라도 가져오라고 한다. 왜냐면 진보정치인은 먼저 생활인이야 되기 때문이다. 생활인이 아니면 진보정치도 할 수 없다.”

노회찬씨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듯이 말도 잘하지만 글도 잘 쓴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이 아닌 그에겐 당연히 생활 수단이 강연과 집필이다.

“노동운동, 진보정치 운동을 하면 당연히 적자 인생이다. 그 전에 빚을 정리해보니 한 2000만원 되더라. 2004년엔가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란 책을 냈는데 운좋게 많이 팔렸다. 빚 싹 다 갚았다.”

그는 지금(물론 빚이 있다. 구체적인 액수는 기자들 말로 ‘오프 더 레코드’라고 했다)도 모 출판사와 책 내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앞으로의 생활고보다 더급한 건 '새로운 진보정치, 진보신당이 전국에 뿌리내릴 길을 찾는 일이라고 했다.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단 한 석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해 현실 정치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이다.

“호수가 꽝꽝 얼어도 사람들은 얼음을 뚫고 낚시를 한다. 의석이 문제가 아니다.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을 뚫으면 된다.”

그래서 그에게 새로운 진보정치는 대중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국민과 소통하는 정당이 돼야한다는 거다. 그것이 자신이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이유라고 했다.

“진보정치를 동호회 모임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 그는 정치란 신뢰만 가면 국민이 인정하게 돼있다고 했다.

그는 한 편으로는 희망을 봤다. 진보정당 후보로 40% 이상 득표를 한 것은 ‘국민들 반이 마음 속에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는 증거’라고 했다. 또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와 자신이 이번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오히려 낙선 이후 진보신당 자진 입당자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하루 입당자가 1000명이 넘는 날도 있었다.

“중학교 동창들이 낙선을 위로한답시고 불러서 어제 부산(그의 고향은 부산이다)에 갔다왔다.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8년 위 선배들까지 노회찬 좀 보자고 나왔더라. 보수색으로 시퍼런 부산에서, 그것도 환갑된 분들이 진보신당 가입하겠다며 왜 입당원서를 안가지고 왔냐고 하더라.”

그는 자신의 국회의원 생활 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안기부 X파일 공개를 꼽았다.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번 삼성특검의 수사가 너무 미진하다고 판단되면 재수사를 요구할 생각이다.”

그는 느닷없이 광고 얘기를 꺼냈다. 낙선한 뒤 마음에 와닿는 광고가 있다, ‘길이 아니어도 좋다’라는 문구가 크게 박힌 자동차 광고.

“내 앞에 길이 없다, 그래서 가야 한다”

“지금 내 앞에도 길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걸어가는 게 곧 길이 될 수도 있다. 물은 길이 없다고 멈추지 않는다. 물은 스스로 길을 만들고 또한 스스로 길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떼고 떠나는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 그는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그 길을 나선다.

“이번 총선에 대해서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진보신당 공동대표로서 지금까지 무엇을 잘했고 못했는지, 진보정당이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원인이 뭔지 곰곰히 평가한 뒤 평생 뼈에 새길 겁니다.”

<경향신문 / 윤성노 기자>

입력: 2008년 04월 25일 18:57:35

작성일 : 2008-04-27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