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피생활은 우울하다.

  정대 형 피해서 이 곳으로 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나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숨어 있는데, 듣기에는 사람 소심해서 한 달은 간다는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자들에게는 딱지를 많이 맞아 봤는데, 남자에게 딱지 맞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자도 안 되다니, 이제 포기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결혼하자는 얘기는 절대 안 할 거다. 만약 그런 말을 또 하면 내가 죽을 때가 됐다는 증거다. 난 살고 싶다. 아니, 나는 불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거의 15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온 학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대한민국 교육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15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교무실의 근무환경이나 학교시설, 교복 같은 겉모습은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한국의 교육체제를 움직이는 운영원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최근의 교육정책과 무관하게 이곳에서는 지난 15년 동안 시골학교의 열등감과 위기의식으로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 교육격차가 더욱 확대되면서 그 압박감은 지난 15년 전보다 훨씬 거세고 맹렬하게 보였다. 영업사원의 경쟁의식이나 군대의 전투정신과 다를 바 없는, 그 강렬한 긴장감의 생존구호들 하며...

  지난 10여년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수구집단이나, 그래도 잘 했다고 자부하는 소위 민주화세력들 모두를 전교학생들 앞에다 모아놓고 묻고 싶다. 뭔 얘기냐고? 뭘 잘했냐고? 지난 10여 년 동안 띨박이를 비롯한 대한민국 1%가 경제대국 10위라는 열매를 독차지하는 동안 대다수의 국민들은 10여년이란 세월을 그들 좋아라 ‘쎄 빠지게’ 허송하고 말았다.

  특히 한국교육은 그 허송세월의 가장 명확한 증거다.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교육학에서 학습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부정적인 결과 중에 하나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내가 항상 말하고 싶은 얘기 중에 하나가 이거였다. 세상은 의외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촐랑대지 마라. 사회주의? 대한민국 교육을 보라!

  변한 게 없으니 다시 적응하라면 적응 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백투더 퓨쳐’가 필요 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조금만 더듬으면 모든 것은 금 새 복원된다. 물론 내 얼굴과 키는 그 때와 그대로였고 내 기력도 아직은 버틸 만하니 내가 준비할 것은 교복뿐이다. 학교에서 받아주면 이번에는 15년 전과 달리 대한민국 인간생태계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오르기 위해 난 이 생존게임에 적극 참여할까? 다른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 한국전쟁 후, 산업화시대, 그리고 15년 전부터 현재까지 수 백년 동안 한반도에 사는 이 민족이 자신들 사회의 자원을 배분했던 이 원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가 이 원리에 동의하고 있는가?

  수 백년 동안 이어 온 이 원리를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확신컨대 절대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딱 하나 있다. 혁명이다. 모든 혁명은 사회주의를 꿈꾸지 않는가? 그렇다면 혁명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교육문제 앞에서는 그래도 사회주의자들과 뭔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오늘 어떤 분이 한국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 분도 어느 새 슬쩍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더니 이제는 대 놓고 안 된다고 한다. 교묘한 계란주의자...그렇다면 교육개혁의 가능성은....게다가 이런 현실에서 입에 풀칠이나 해볼까 바둥대는 내 모습도,..

우울하다.

  
  2. 아! 불사를리아, 나는 도망가고 싶다.
 
  춘천, 그곳은 나를 배반했다. 난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겠다. 내가 사랑하는 바다가 있는 이곳, 내 생의 마지막 종착지로 삼고 싶은 이곳, 그러나 학교가 있고 집이 있는 이곳이 이제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집에 있는 것이 학교에서 얻은 우울함을 더 해준다. 가족제도는 언제까지 나를 시험에 빠뜨리려는 것인지...
 
  끝나면 학교 앞 20여 미터 정도에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있다. 매일 끝나면 혼자 그곳으로 간다. 요즘의 이곳 날씨는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한 듯 너무나 온화하고 맑다. 멀리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따스하고 은은한 바람은 차가운 내 영혼을 감싸주며 위로하고, 신비함 마저 자아내는 청동 빛 푸르른 물 속을 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을 벗어나 물 속 저 깊은 곳으로 멀리 멀리 사라지고 싶다.

  그러나 꽃문어가 돼 물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 인간의 손에 잡히면 난 ‘그들’에게 살아서도 씹히고 꽃문어가 돼서도 씹히는 불행한 운명이 될 수도 있다. 꽃문어가 될 수 없다면, 이번 주 토요일에 혼자 양양 오산 해수욕장 근처에 개인소풍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만약 간다면 아무도 말릴 수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동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개인소풍이기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소풍 장소에 안 왔으면 좋겠다.

.....

  방파제가 저 멀리 수평선 끝까지 쉼 없이 이어진다면 그 길을 따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길은 등대가 서 있는 그 끝에서 멈춘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300마일 해상 근처에 있는 나만의 이상세계, 신비의 섬 불사를리아를...

  옆구리에 날개가 달렸거나 똥꼬에 야마하 700마력짜리 모터가 달린 흰 당나귀가 있다면, 난 교무실에 있는 아무 나타샤나 태우고서 뭉게구름 피어난 저 푸르른 수평선을 향해 자유롭게 날개 짓을 하거나, 아니면 청동 빛 푸르른 물속으로 들어가 파란 물 속 세상을 신이 나서 마구 마구 헤엄치며 불사를리아로 갈 수 있을 것이지만...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린다!
  
  그러나 내 개인주의의 실현, 불사를리아 근처에는 ‘쉬어도’도 있다고 한다. 바다에서 죽은 어부들이 인간세계의 고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누린다는 신비의 섬 ‘쉬어도’. 내가 불사를리아에 간다면, ‘쉬어도’에도 들러 묻겠다. 이번 노동절, 이곳은 어땠는가 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방파제에 들렀다. 어제는 텅 빈 이곳이 오늘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며 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노동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횟집에도 사람들이 있다. 노동절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노동절에는 음식점은 안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노동절 얘기로 끝을 맺는 건, 개인주의자의 미안함 때문일까?

  근데, 옆구리에 날개가 달렸거나 똥꼬에 700마력짜리 야마하 모터 달린 흰 당나귀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타샤는...

(내가 아는 ‘나’씨가 정대 형 밖에 없는데 이거 읽고 또 오해해서 더 열 받으면 어떡하지? 큰일이다...불사를리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작성일 : 2008-05-02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