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에 있는 동안에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애썼다. "정치와 정치인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만큼, 정치부에 있다고 정치를 좀 아는 척 뻐기는 기자들 역시 재수없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각은 10일 새벽 1시 50분. 나는 지금 영등포 민주노동당사에 있다. 일하고 있다. 거대한 전투였던 18대 총선이 끝났다. 피곤이 밀려오기도 하는데, 오늘만큼은 정치 이야기를 해야겠다.

8일 밤, 나는 고양시 화정역 사거리에 있었다.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의 마지막 유세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심 후보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목소리도 많이 잠겼다. 그녀의 당선을 위해 약 2주 동안 지역구를 누빈 선거운동원들도 역시 피곤해 보였다.

심 후보는 사자후를 토했다. 국회에 보내달라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민을 위해서 살겠다고... 아픈 목을 타고 올라온 그녀의 목소리는 도시를 때렸다. 심 후보를 위해 덕양구 곳곳을 누볐던 영화배우 문소리씨 역시 마음을 담아 외쳤다. 이미 검증된 심상정을 다시 국회로 보내달라고.

마지막 유세를 마친 심 후보는 지지자들과 함께 로고송에 맞춰 춤을 췄다. 거대하고 흥겨운 군무였다.

하지만 아무리 군무가 거대하고 흥겨워도 현실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그 때 나도, 군무를 추고 있던 심상정 후보도 알고 있었다. 심 후보는 시종일관 2위였고, 선거에서 2위란 패배와 동의어란 것을.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고, 꿈을 꾸고 무모하더라도 도전을 한다. 그건 아마도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군무를 추는 심 후보는 분명 속으로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승리하게 해달라고. 군무에 끼지 못하고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던 나도, 간절히 바랐다. 내일 저녁 인간 심상정의 웃는 모습을 꼭 보게 해달라고.

9일 저녁 투표함의 뚜껑이 열렸다. 심상정은 떨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신인 한나라당 후보에게 졌다. 노회찬도 떨어졌다. '대한민국 1%'라는 홍정욱에게 졌다. 패배는 누구에게나 쓰리고 아프다. 심상정도, 노회찬도 웃지 못했다. 애써 웃으려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노회찬은 말했다. 한 달 뒤에 뼈가 아릴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현실이라고.

그래 이게 현실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미성숙의 증거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분하고 또 화가 난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남루하고 비루하다. 술판에서 여자 가슴을 주물러 유죄까지 받은 성추행범 최연희는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여기자의 뺨을 자기 맘대로 톡톡 치고, 그게 성추행인지도 몰랐던 정몽준은, 2002년 대선 마지막날 노무현 지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 정몽준은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그런데 2007년 정치부 기자가 뽑은 최고의 국회의원 심상정은 떨어졌다. 고양시 덕양구 주민들의 선택은 그러했다. 삼성 떡값 검사 명단을 발표하고, 삼성의 비리에 누구보다 분노했던 노회찬도 떨어졌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 현실은 현실이고 어른이라면 그걸 인정해야 한다.

언젠가 노회찬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젊은 시절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또 너무 많이 울어봐서 이제 웬만한 일에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진짜 아파본 사람은 쉽게 실망하지 않고, 어둠의 밑바닥을 홀로 기어본 사람은 외롭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추상적인 희망을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 새벽, 분명히 잠 못 이루고 있을 심상정, 노회찬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아픈 걸 아프다 말 못하고, 외로운데 안 외로운 척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쓰린 것인지 알기에, 이 새벽 심상정, 노회찬이 너무나 ‘짠하다’.



덧붙이는 말)
고상한 척 "나는 정치 따위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저 멀리 이라크에서 아이들이 폭탄 맞아 죽고, 한강과 낙동강이 운하라는 이름으로 시멘트에 갇힐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정치는 우리의 삶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직접적으로. 우린 그걸 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