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 소설가, 제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jaesung4@yahoo.co.kr

1.

오늘도 강동구의 한 시영아파트 노인회관에 가면 그 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배꼽 높이보다는 클까. 조그마한 키에 납작하니 작은 얼굴, 까만 눈망울이 반짝이는 87세의 한 할머니가 치솟은 고층 아파트 사이로 바지런히 오가며 담배꽁초도 줍고 낯익은 사람들과 활짝 웃으며 수다 떠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민들은 이 독특한 할머니를 ‘독립군 할머니’로 부른다. 87세의 고령에도 아파트 노인회 총무를 맡아 복잡한 돈 계산을 척척 해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녀의 이름은 이병희이다.

이병희 할머니는 외부 디자인은 독특하고 현대식이지만 너무 빼곡하게 지어져 옹색한 느낌을 주는, 서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지어서 분양한 소형 아파트 단지의 11층에서 혼자 산다. 방 한 칸에 거실이 딸린 조그만 공간에 이리저리 그릇을 벌여 놓다보니 부엌이 따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아파트다.

그래도 벽마다 크고 작은 예쁜 그림들이 걸려 있다. 예술가 자녀를 둔 덕분이다. 이 집안의 예술가적 기질은 우연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의 손녀이기 때문이다(이병희 님은 이육사보다 14살이 어리나 항렬로는 손녀뻘 되는 한 집안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가깝게 교류했다고 한다. - 편집자 주). 이병희 할머니의 자녀들 뿐 아니라 그녀에게는 조카뻘이 되는 이효정 할머니도 시인이며 그녀의 자녀들 역시 화가와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 이육사.

이병희 할머니는 본인과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6년 독립유공자가 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 만들어진 역사관에 가면 그녀의 육성증언을 들을 수 있으며 3.1절이나 광복절만 되면 매년 여러 방송매체에서 찾아와 취재해가느라 바쁘다. 나이는 많아도 정신과 몸이 60대밖에 안 되어 보일 정도로 건강한 그녀는 어떤 요청에도 기꺼이 응해주고 기념식마다 맨 앞자리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다. 아버지 몫의 독립유공자 연금까지 받다 보니 노인치고는 생활도 넉넉한 편이다.

2.

이병희 할머니의 이 모든 행복한 노년의 혜택은 온전히 이육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1996년 이전까지 완전히 잊혀 있었으며, 오히려 안기부의 비밀 문서철에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불순분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신문에는 그녀가 사회주의 노동운동 조직의 일원으로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

그녀가 갑자기 영웅이 되어 버린 것은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다. 이육사의 호적에는 1944년 북경 일본 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사망 후 이병희에게 인계되었다고 남아있었고 뒤늦게 언론이 이병희라는 인물을 추적해 찾아낸 것이다.

“감옥에 가보니 이육사가 눈을 부릅뜨고, 성난 얼굴로 죽어 있었어. 온 몸이 고문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 내가 두 눈을 감겨 주었어. 펑펑 울었지.”

이병희가 아는 이육사는 북경에서 언론인으로 행세하면서 권총을 사서 국내에 반입하는 위험한 일을 했다. 공식적으로는 북경과 연안, 중경 등지에 퍼져 있던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을 연결해 좌우합작을 추진하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잡힌 것으로 되어 있다. 이병희는 북경에서 그와 한 방에 살며 보조원 역할을 했고, 동시에 체포되었다가 결혼을 하겠다는 서약을 해주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육사가 감옥에서 죽은 후에는 시신을 인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졌고, 대표적인 민족 시인으로 추앙되어온 이육사의 시신을 인수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이병희는 졸지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생각지도 못했던 노년의 호사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취재를 간 내게 분명히 말한 적이 있다.

“이육사는 사회주의자였어. 나도 그렇고. 우리는 다 사회주의자였지.”

사뭇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불후의 명시 ‘광야’를 남긴, 대표적인 민족시인 이육사가 사회주의자라니?

3.

이병희, 아니, 이육사 집안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는 간단치가 않다. 이병희와 남편, 그녀의 사촌오빠 이병기, 그리고 그녀의 조카뻘인 이효정이 이재유가 주도한 사회주의 조직인 ‘경성트로이카’의 일원으로 감옥살이를 한 기록이 있다. 이효정의 남편은 훗날 월북해 남파간첩으로 내려오기까지 했다. 집안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민족주의자들의 배신과 변절’을 성토했다. 실제로 그녀의 집안에는 해방 후 좌익으로 분류되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무참히 학살된 어른이 여럿이다.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현재 모습.

이병희는 서울여상을 다니다가 생활고로 중퇴한 후 동대문 밖에 있던 종연방직에 취직해 일하다가 사촌 이병기를 통해 만난 이재유로부터 사회주의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933년 파업을 주동한다. 당시로서는 경성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던 종연방직 5백여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은 신문에 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연행된 이병희는 너무 나이가 어려 구속은 면했으나 다시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 조직을 계속하다가 재차 연행되어 꼬박 징역 4년을 살게 된다. 감옥에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온 이재유를 만나본, 오늘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증인이 된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운동가의 한 사람이던 전설적인 이재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누가 ‘병희야’ 하고 불러. 돌아보니까 얼굴이 퉁퉁 부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 창틀에 서서 날 부르는 거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니까. ‘병희야, 나야, 재유야.’ 그제야 그 사람이 이재유라는 걸 알았지. 그 사람이 앉았다가 일어선 자리에는 피가 흥건했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맞았는지 옷이며 앉은 자리가 온통 시뻘건 피였어.”

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병희는 경성트로이카의 동지이던 이종희를 따라 북경에 간다. 부자였던 이종희의 집에 머물며 중국 음식을 해먹던 일은 긴 인생 역정에 남은 너무나 짧은 행복한 추억의 하나이다. 북경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육사를 도와 심부름을 했다지만, 그 심부름이란 것도 생명을 건 모험들이었다.

“이육사가 체포되고 내 방으로 경찰이 날 잡으러 온 거야. 평소에 잘 아는 일본 형사야. 방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강제로 벌컥 열고 들어서는데 큰일 났어. 동지들 주소하고 이름을 적은 명부를 없애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거야. 나는 옷을 홀랑 벗어 버렸어. 옷 갈아입는다고. 그랬더니 일본 형사가 깜짝 놀라 다시 나가버리는 거야. 차마 못 들어오고 기다려 주는 거야. 명부를 입에 넣고 씹어 삼켜 버렸지. 일본 형사라도 참 점잖은 사람이었어. 나중에 해방되고 만나는 조선 형사 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여자 옷 홀랑 벗겨놓고 아랫도리로 피가 줄줄 흐르도록 때리는 건 예사고 우리 조카 효정이는 매 맞다가 팔 까지 부러졌잖아? 짐승도 그보다는 낫지. 일제 밑에서 충성을 다하던 조선인들이 해방 후에 좌익 잡는 걸 보면 지금도 치가 떨려.”

4.

중요한 것은 이육사가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을지 몰라도 실천적으로나 문학적으로는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그가 사회주의였다는 이병희 할머니의 말은 별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병희 자신도 해방 후 북한에서 1년 간 살아 보기도 했으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삭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월남해 버린다. 남한 출신들을 동지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 사람들은 자신이 4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는 증거를 보여줘도 냉대하기만 했고 일제 강점기보다 더 가혹한 사상교육이니 강제노역은 견디기 힘들었다. 남한으로 돌아온 후에는 평범한 건축업자의 아내로 평생을 살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 6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2004년 10월 29일/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이병희 님. 이병희 님에 의해 "광야", "청포도" 등 이육사의
    시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육사나 혹은 그의 가족들이 어떤 사회변혁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식민지 시대에 과연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일 것이다. 보수파 역사학자나 친일파의 후손들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현실을 들이대며 사회주의가 틀렸으며 자기들이 옳지 않았느냐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기준으로 합리화시키려는 변명일 뿐이다. 적어도 이병희나 이육사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던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가 어떤 한계와 문제점을 가졌는지 지적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해방 이전에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주류였으며, 변절자들은 무서워서,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해 그들의 뒤를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해방 후 사회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한국전쟁으로 서로 철천지원수가 된 후에 변명거리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정말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노무현 정권이지만,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들을 복권 시킨 일만큼은 잘했다고 새삼스레 칭찬해 주고 싶다.


출처 - 전태일기념사업회
http://www.chuntaeil.org/taeil/board/paper_view.php3?paper_id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