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흔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는 존재처럼 찬미된다. 그러나 애당초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들을 그리 존경할 필요가 없다. 원래 그렇게 타고났는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영웅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도 죽음을 적잖이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려움과 끝까지 싸운 끝에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진정한 영웅이다. 근대 서양미술사상 최고의 조각가로 꼽히는 로댕이 ‘칼레의 시민’을 만들 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의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인 칼레로부터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저 유명한 ‘칼레의 시민’ 제작을 의뢰받은 것은 1884년의 일이다. 1895년이 돼서야 칼레 시청 앞에 조각을 설치할 수 있었으니 그는 꼬박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작품의 제작에 바쳤다. 주제에 대한 로댕의 접근은 매우 독창적이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여섯 명의 군상이 어슷비슷하게 무리를 이뤄 낮은 땅에 서 있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이전까지 이런 기념조각은 무리 중 대표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도로 웅장하게 빚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렇게 해서 영웅들은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것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존재들로 표현됐다. 그러나 로댕은 집중이 아니라 확산, 수직이 아니라 수평, 외침이 아니라 침묵에 관심을 두었다. 기왕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들은 지금 극심한 공포에 떨면서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그 처연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로댕은 이들이야말로 진정 지극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영웅들임을 생생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인간적인 영웅들의 인간적 모습 그려   유럽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의 아름다운 사례로 꼽히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에서 발생했다. 전쟁 초기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순조로운 전쟁 수행을 자신했으나 북부도시 칼레가 기근에도 불구하고 11개월간 버텨내자 전쟁 계획에 심대한 차질을 빚게 됐다. 하지만 고립무원의 칼레시는 결국 항복을 하게 됐고 에드워드 3세는 장기간의 저항에 대한 책임을 물어 칼레의 시민 가운데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소식은 곧 파수대 앞에 모인 칼레의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시민들은 끝내 항복하게 됐다는 굴욕감과 그럼에도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들 가운데 여섯 명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불안감 등으로 피 같은 눈물을 흘렸다. 패자의 운명은 언제나 그렇듯 야속하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식이 계속되는 사이 외스타슈라는 이 도시의 가장 부유한 시민이 먼저 죽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서로 죽기 싫어 제비를 뽑는다든지 희생자를 지명하는 것은 도시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패했지만 적 앞에 당당하게, 후손 앞에 떳떳하게 나섬으로써 도시의 정신과 민족의 혼(魂)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결단에 자극돼 다섯 명의 다른 시민이 차례로 희생을 자원했다. 이로써 도시는 그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로댕은 앞줄 중앙의 외스타슈를 지도자다운 덕성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긴 머리와 수염으로 가부장적 위엄을 풍기는 외스타슈는 약간 고개를 숙여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순종하고 있다. 그의 곁에 그처럼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이 장 데르라는 법률가이다. 법률가답게 장 데르는 악다문 입과 빳빳한 걸음으로 마치 선돌 같은 느낌을 준다. 외스타슈, 장 데르와 함께 앞줄에 서 있는 피에르 드 위상은 두 사람에 비해 다소 감상적이지만 역시 의연한 모습이다. 뒷줄의 나머지 세 사람은 앞줄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감이나 확신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그들은 지극히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들의 결단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 눈앞의 죽음에 깊이 몰입해 다른 생각일랑 아예 가질 엄두도 못 낸다. 이들 가운데 특히 머리를 손으로 쥐어 싸고 있는 앙드리외 당드레는 ‘우는 시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그 어떤 위로로도 해소될 수 없다. 아이러니컬하게 죽음만이 그 고통과 공포를 끝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울음에서 세계의 해체가 느껴진다. 한 영혼의 종말은 그에게 곧 세계의 종말인 것이다. 지금도 칼레 시 청사 앞에 의연히 서 있어 로댕의 위대한 천재성은 ‘칼레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데 있다. 분명 로댕은 창조주의 능력과 권위를 지닌 인물이다. 어떻게 한갓 물질로부터 이런 생명감을 추출해낼 수 있었을까? 로댕은 하나의 혼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그가 평생 만든 작품 수만큼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을까? 그의 작품들은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다. 로댕의 이 위대한 조각은 지금도 칼레 시 청사 앞에 의연히 서 있다. 예쁘장하게 지어진 플랑드르 르네상스 스타일의 시청 건물과 잔디밭, 꽃밭 등 ‘칼레의 시민’을 둘러싼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평화와 행복이 과연 어떻게 지켜지는 것인지를 그 긴장된 조화를 통해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

작성일 : 2008-09-08 02:15